지난 13 금요일, 어필공간 사이多에서는 40여명의 관중분들을 맞이하여 UNHCR RSD (Refugee Status Determination / 난민 지위 심사) officer인 심은아님과, ‘헬프시리아’의 사무국장 압둘 와합님의 강의를 개최했습니다. 4시간 동안 열정적이고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풀어보았습니다. 


1부 난민보호를 위한 15년 동안의 유목생활 - 심은아



심은아는 이른 나이에 자신이 세계의 작은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그녀는 머리를 빡빡 밀을 정도로 포스트모더니즘에 깊이 빠져있으며 티벳과 네팔에 홀로 베낭여행을 다니고 중국 조선족자치구까지 다녀온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여행 중 난민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지 우연의 일치로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된것이다. 그녀는 우연으로 인한 불평등은 무의미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이상’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도 그녀의 이상은 계속 깨지게 되었다. 때는 2000년대 초반. 국내법이 난민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던 시기였고, 국내 대학에서도 국제난민법이나 국제개발을 다루는 학과가 없었다. ‘난민 보호’라는 개념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한국에 들어온 난민들에게 지금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자원 봉사하던 도중 “난민들 비자 만료되어도 괜히 여기서 일하려고 계속 있으려 하는거 아냐” 등의 발언들을 통해 정부의 배타적인 태도를 접해보면서, 사람은 합법적인 신분 없이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들을 돕기 위해 더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대학 때 난민과 관련된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공부하는 동안 생계를 꾸리기 위해 BBC 와 다른 곳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이 이 해당 분야에 기여할수 있는 방법과 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그녀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었던 British Refugee Council 이라는 단체를 통해 혈기왕성한 난민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전쟁처럼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경험을 한 그들에게 무료한 일상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주시한 후,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들을 위한 ‘축구 모임’을 설립한 것이다. 2005년경 설립된 이 축구 모임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그 후 그녀는 10년가량 유엔난민기구 난민 지위 심사원 (UNHCR RSD officer) 으로 활동했다. ‘난민 보호’의 틀 안에서 다양한 난민들을 심사했다. 심사 작업 중 하나는 난민을 구금으로부터 ‘석방’하는 것이었다. UNHCR 인도네시아에서는 호주로 가려고 하는 난민들을 수용소에서 석방하는 작업을 했고, UNHCR 인도에서는 10년 넘게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심사했다. 한 달 동안 커텐으로 가려진 수용소 안에서 집중적으로 심사를 본 결과 많은 난민들이 석방되었다. 


그녀는 터키, 인도, 케냐, 이라크에서도 난민 심사를 보았다. 터키에서는 부당하게 난민 신청이 기각된 이들을 위해 항소 심사를 했고, 인도에서는 수많은 수의 난민들을 심사했다. 때로는 난민 엄마의 아기를 직접 품에 안고서 심사를 진행했다. 




케냐와 유난히 인연이 깊었다. 케냐에서 두번이나 일을 하게 되었는데, 두번째 파견 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캠프인 ‘다답’로 갔다. 그러던 중 정부의 부정부패로 난민캠프가 갑자기 철폐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그녀는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단지에 있던 난민들을 비행기로 ‘카쿠마’라는 다른 캠프로 비행기로 이동시켜, 그 곳에서 심사를 계속 진행하게 하는 계획이었다.




그녀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UN’이라는 국제 기구에서 활동하며 느낀 점을 얘기해주었다. 첫 번째는 국제 법은 국내에서 집행이나 처벌이 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가들이 국제법을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국제 법은 결국 한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두 번째는 국가들이 난민 법을 준수하지 않으며 법적 의무를 충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 실상에 지쳤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UN 난민기구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기부의 차원에서는 활성화 되어있지만, 기존의 갈등이나 난민 발생을 예방하거나 통제 하지 못하고, 사전 대책 없이 인도주의적인 대응만 보이는 실상에 답답했다고 말했다. 협력해야 했던 정부들의 부정부패에도 회의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유엔난민기구같은 단체 안에서 계속 일을 해나갈지, 단체 안에서 큰 혁명을 일으킬지, 아니면 아예 단체 밖으로 나가서 영향을 일으킬지 고민했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3번을 택했다. 그녀는 이직을 하고 다음 달 UN 사무국 정치부에서 대사의 특별 보좌관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하기로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론적으로 난민이 생기기 전에 사태를 예방할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국가간의 갈등, 그리고 내부적인 갈등 때문에 난민이 발생했지만, 2000년대 이후는 보다 복합적이고 비국가 간의 무력 충돌 때문에 난민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정치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해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일하게 될 직책에서는 보다 거시적인 규모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청중 중의 한 명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나가면서 난민에 대한 열정을 유지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면 지칠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오히려 난민을 보호나 도움의 대상이 아닌, 그저 "같이 동행하는 사람"로 대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2부 - 시리아의 현재 정세와 해법 : 압둘 와합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관중들의 재촉에 압둘 와합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답했다. 농담하는 모습도 굉장히 한국적이었다. ‘심각한 얘기를 하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눈치 있는 한 마디까지. 


한국에서 생활한지는 7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한국과 오래토록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시리아에서 살때 사귄 한국 친구들을 통해, 시리아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리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2009년 가을, 시리아 및 아랍 법에 관한 책으로 가득찬 짐가방 두개와 손가방 하나를 들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다. 택시 기사들과 대화하면서 한국말 실력을 서서히 늘려갔다고 했다. 시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아~ 시리아!” 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택시 기사도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신난 그는 대화를 이어나가다 충격적인 한 마디를 듣게 되었다. “시리아…거기 브라질 밑에 있는 곳!” 




이런 경험은 생각보다 흔했다. 그는 시리아에 대해 아예 틀린 정보나 모순적인 태도를 가진 한국인들이 많다고 한탄했다. 자신을 ISIS 구성원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평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장난을 치고 싶을 때는 맞으니 조심하라고 얘기한다고 밝혔다), 대체적으로 이슬람교인과 난민들에 대한 왜곡되고 심히 단순화된 보도가 많다고 했다. 


그는 ‘시리아’와 시리아 분쟁에 대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2013년도에 ‘헬프시리아’ 를 설립했다. ‘사이다’ 강의에서도 시리아에 대해 세세히 묘사했다. 시리아는 남미가 아닌 아시아에 있고,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인으로 구성 된 나라다. 1920년 국가가 설립된 후 거의 45년 동안 평화를 유지해왔지만, 1970년도에 하페즈 알아사드가 정권을 잡으면서 자유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었다. 비밀 경찰들이 학교에까지 들어오고, 가족에게 조차 정치나 알아사드에 대한 얘기를 하지 못 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수도인 다마스커스에서 등교를 하던 20분 동안에도 단속이 있었다고 했다. 



시리아 국민들은 변화를 원했다. 편하게 친구를 만나고 얘기를 나눌수 있는 일반적인 삶을 갈구했다. 2011년도에 아랍의 봄이 오며 기회가 찾아왔다. 시리아 국민들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혁명을 일으킨 투니지아와 이집트를 보며 자신감을 가졌고, 평화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알아사드 정권은 시위자를 강력하게 탄압하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국민들 사이에서 알아사드 정권을 추방해야겠다는 의견이 점차 팽배해졌지만, 시위가 계속되며 국민들은 참혹하게 학살당했고, 정부는 폭력적인 수단을 중단하기는 커녕 오히려 강화해갔다. 2011년 11월에는 시리아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리아 자유군 (Syria Free Army)이 결성되었고, 알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이란, 쿠바, 러시아 등의 국가들과 해당 정권에 반대하는 아랍 국가들이 대리전을 일으키며, 분쟁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후 다른 국가들도 분쟁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지만, 정치적인 목적과 이해로 인해 소극적이고 모순적인 정책을 유지 할 수 밖에 없었다. 터키는 공식적으로는 아사드 정권을 반대했지만 시리아 내부에 있는 쿠르드 (Kurds) 소수민족들을 내쫓기 위해 분쟁에 참여했고, ISIS를 모르는 척한다고 했다. 러시아 역시 ISIS를 폭격한다는 명목로 무기와 군인들을 보냈지만, 사실상 그 중 약 6 ~ 7 퍼센트만이 ISIS를 겨낭했고 나머지는 시리아 자유군을 노렸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미국은 더욱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시리아가 지도자를 잃으면 미국과 친밀한 이스라엘에 반립할 것이 분명하다 보니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알아사드 정부를 반대하되 비공식적으로는 그와 협상을 했다. 알아사드 정부는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악용하며 폭력적인 수단을 유지했다. 심지어 화학 무기를 사용해 몇천명의 아이들을 학살했다. 미국의 보다 강력한 주의에 화학 무기 사용은 그만두게 되었지만 시리아 국민들은 미국이 무심하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UN도 알아사드 정부와 외교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 시리안들에게 알아사드를 지지하면 약품과 교육을 제공해주겠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국제사회가 시리아인들을 도와줄거라는 기대는 점점 소멸했다고 말했다. 


ISIS 테러집단 역시 처음에는 시리아 자유군을 지지하는 척을 하며 시민들 사이에 더 많은 폭격을 일으켰다. ISIS는 이라크 전쟁 때부터 미국과 서구 국가에 대한 반감과 여러 기타 요인으로 인해 과격화된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생긴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전 세계적인 이슬람 국가 (Islamic nation) 을 설립하자는 다수의 지지를 받은 목표 덕분에 2014년도부터 인원수가 증폭했지만, 작년부터 서서히 인원수가 적어졌다고 말했다.


이런 정치 및 이해 관계 때문에 시리아인들은 참혹한 분쟁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는 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설명해주었다. 시위를 지속해온 용감한 시리안들에게 시리아 정부는 계속 폭력을 가했다. 마을들을 완전히 봉쇄시키 마을에 갇힌 국민들은 굶고, 병들었다. 8개월 째 봉쇄된 마을 '마다야'에 갇힌 한 의사는 아픈 아이를 위해 차 두대를 팔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쌀 한 봉지 (약 4kg)의 값이 오른 것이다. 그는 치료를 받기도 어렵고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아프더라도 약이 너무 부족해서 비밀 쉼터에서 필요한 양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마취도 하지 못한 채 수술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 쉼터를 방문했을 당시 본 포스터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포스터의 내용은 ‘화학 무기에 폭격 대처법"이었다. 




수많은 시리안들이 인근 국가들로 피난을 갔다. 요르단에 8만명, 레바논에 100만명, 터키에는 3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수많은 시민들은 유럽으로 가는 피난길에 바다에서 빠져 참혹하게 죽었다. 분쟁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과 정체성을 박탈당하고, ‘난민'이 되어버렸다. 시리아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난민 캠프에서 구호 단체가 음식을 제공해준다고 공지해도, 아무도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왜 음식을 가져가지 않는지 그들에게 물어보니, 자기보다 1-2개월이나 더 굶주린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변호사였고 선생님이였던 자신이 이제 ‘도움이 필요한 자’가 됐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시리아의 미래인 아이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많은 아이들이 음식은 물론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난민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난민캠프에서 아이들을 직접 가르친 적이 있는데, 한국어로 ‘너는 특별하다’라는 말을 알려주고, 한국 책을 번역해서 읽어주었다. 그때 만난 아이들이 너무 순수해서 마음이 아팠고, 그 순수함에 환멸이 더해지고 있는것을 보게 되어 놀랐다고 전했다.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가진 어떤 아이는 그에게 “내가 공부해서 뭐하게요” 라고 따졌다. 어린 아이가 그런 의기소침한 감정을 깊게 느꼈다는 것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두시간 동안의 강연 동안 그는 간간히 농담도 하며 무거운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지만 그의 눈빛만은 내내 짠했다. 그는 세계 언론에 크게 퍼졌던 시리아 난민 아이 두명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피 묻은 난민 아이 뒤에서 비웃고 있는 정치인들을 묘사한 만화 한장도 보여주었다. 




그는 한국 정부와 사회도 시리아 사태에 대해 비슷하게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대사관은 그의 7년 간의 한국 생활을 무시하고 그의 동생에게 지나치게 냉정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런 이슈에 관심을 가지지만 빨리 잊어버린다고 했다. 그는 이런 모습에 참 섭섭하다고 밝히며 강연에 참석한 이들에게 조그마한 도전을 제시했다. 


물론 시리아 분쟁같은 이슈는 너무 복잡하고, 어디서부터 도와야할지 분간이 안가서 돕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각자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이런 이들을 위해 사용하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관심은 행동과 함께 해줘야 관심이라는 확고한 지적을 했다.


그가 보여준 마지막 사진은 시리아에 있는 폐쇄된 집에서 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폐쇄되었는데도 왜 집을 떠나지 않는지 물어보니, “내가 이 집을 떠나고 캠프로 가면 나도 [난민들] 중 한 숫자가 되어버린다”고 답변했다고 했다. 그가 살아왔던 삶을 가능한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이다. 분쟁 속에서도 자신만의 ‘존엄성’을 지키고 싶은 의지가 인상적이었다. /



심은아님과 압둘 와합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분이 비슷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난민 분들을 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들을 ‘난민’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그리고 우연찮게 난민이 된 ‘사람’이라는 태도였습니다. 기자로서 개인적으로 앞으로 난민들과 이런 분쟁의 피해자들에 대해 기사를 쓸때 그 들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지켜주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기 인턴 진유선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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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익법센터 어필 AP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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