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릇한 새싹이 돋기 시작하던 3월 말, 어필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호스트 네이션"을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기지촌 클럽 산업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필리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연습생 여성들을 관리하는 한국인 남성 미스터 정.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얼마나 연습생 여성들을 아끼는지 누누이 강조합니다. 본인이 관리하는 여성들이 한국에서 되도록 좋은 클럽에 가서 착한 매니저들을 만나서 힘들지 않게 일하길 바란답니다. 좋은 클럽에 취직하려면 날씬하고 예뻐야 하기 때문에, 연습생을 뽑을 때에도 날씬한 여성들을 선호한다고 말했습니다. 

 

매니저 정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연습생들의 노래 지도입니다. 하지만 영화에 출연한 필리핀 이주여성들 중 클럽에서 노래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미군 손님들의 말상대가 되어서, 생활에 충분한 급료를 받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음료를 팔려고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음에도 매니저 정은 계속해서 연습생들에게 노래 연습을 시킵니다. 연습생들의 한국 입국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비자를 받으려면, 그들의 노래 영상을 한국 영상물등급위원회에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일을 하는 걸까요? 

필리핀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매니저인 마담 욜리 또한 말합니다. 본인은 어려운 형편에 놓인 필리핀 여성들을 돕고 있다고. 대학 졸업장을 가졌음에도 마땅한 직장을 찾기 못하는 젊은이들이 차고 넘치는 필리핀에서, 그들이 성공할 수 있게끔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본인의 역할이라고. 형편이 어려운 필리핀 남성들은 마담 욜리의 도움을 받아 복싱 선수가 되고, 같은 처지의 필리핀 여성들은 마담 욜리의 손길을 거쳐 한국의 미군 클럽에서 일자리를 찾습니다. 마담 욜리의 말에 의하면, 그가 길러내는 건 매춘부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서는 젊은이들입니다.

 

한국행을 앞둔 연습생 마리아에게, 손님들의 행실은 마리아가 그들을 얼마나 제지하는지에 달렸다고 마담 욜리는 거듭 조언합니다. 열심히 일하기만 한다면 필리핀에서 판매원으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새로운 생활을 앞둔 마리아보다 더 들뜬 목소리로 설명합니다. 

 

한국에 있는 미군 클럽에서 이주노동여성들을 '관리'하는 파파 정 또한, 이주노동여성들의 삶이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말합니다. 전처럼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일이 많지 않고, 설령 성매매를 하더라도 모두 이주노동여성들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파파 정은 전국 곳곳의 기지촌 클럽들 간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끈끈한지, 그래서 클럽 일을 못 견디고 계약 기간 만료 전에 도망쳐 나간 이주노동여성들을 다른 클럽에서 찾아내기가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최약체들 중 하나인 이주노동여성들, 특히 E-6비자를 받고 들어온 이들이 거주지를 옮기거나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날씬하고 예쁜 필리핀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한국의 '좋은 직장'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마리아는 딸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한국행을 택했습니다. 필리핀에서 과일과 어묵을 팔면서 버는 돈으로는 가족들 입에 풀칠만 간신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딸을 키우며 부모님 생계비까지 챙겨야 하는 마리아에게,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몇 년 전 이름을 "아메리카타운"에서 "국제문화마을"로 이름을 바꾼 미 공군기지 인근 동네가 바로 마리아의 직장이 있는 곳입니다. 마리아가 일하는 클럽에는 못된 손님들도 물론 오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견딜 만한 업무 환경이라고 마리아는 말합니다. 필리핀에 있는 딸과 영상통화를 하는 마리아의 눈에는 그리움이 한가득 묻어나지만, 그래도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에게 매달 돈을 보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매매를 강요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주노동여성들의 상황이 '전보단 나아졌다' '살 만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반면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 조이는 미스터 정이 말한 것과 같은  '좋은 직장' 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좋은 직장'을 구했었더래도 조이가 행복할 수 있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클럽에 드나드는 군인들은 조이를 "낮은 사람" "주시걸"로만 취급했습니다. 손님이 부어버린 술에 온몸이 젖었음에도 계속 일을 해야만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신체적 접촉이나 성매매를 요구하는 손님들을 거절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요. 조이가 충분한 월급을 받으려면 손님들이 음료를 많이 사줘야 하는데, 이들이 음료를 사게끔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조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클럽 주인이 조이의 성과에 만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여성들에게 급료를 넉넉히 지불하는 건 클럽 사장의 손익계산에 맞지 않는 일이었거든요. 또한, 업주는 조이와 동료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끊임 없이 감시해왔습니다. 가게 안 감시 카메라 설치는 기본이었고, 남자친구를 만들어 데이트하는 것에도 제약이 있었으며, 심지어 전기 콘센트를 뽑지 않고 외출했다고 벌금을 물리기도 했습니다.

 

미군 클럽에서 근무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여정 중에도 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었습니다. 사실 필리핀 정부는 한국 엔터테인먼트(E-6-2) 비자를 가진 여성들의 출국을 금지합니다. 이런 상황에도 한국 정부는 E-6-2 비자를 발급해줌으로써 필리핀 이주여성들의 입국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리핀 이주여성들이 필리핀 정부의 규제를 따돌리고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여러 경유지를 거쳐야만 하고, 거액을 주고 불법 브로커들을 고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필리핀 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이주노동여성들은 본인들이 이러한 불법적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복잡한 불법 출국 과정을 밟는 동안 여성들은 가족들과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또, 말레이시아 출입국 직원들을 피해 이리저리 숨으며 긴장을 한숨도 늦추지 못했습니다. 지시받은 장소에 숨어서 다음 연락이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기도 했고요. 

 

결국, 조이는 클럽을 빠져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필리핀 이주여성들과 함께 소송을 준비합니다. 성매매알선 등 범죄행위를 한 업주를 형사처벌하기 위한 소송입니다. 소송 준비는 어렵습니다. 당사자들의 증언이 소송에 사용할 수 있는 증거의 전부이기에, 증언의 신빙성이 중요하고, 사건의 경위와 피해사실들을 되도록 정확히 진술하고 기억해내야 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증언들을 법정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것 또한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소송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잘못일까요? 

영화는 이 모든 현상을 개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달합니다. 적절한 삶의 수준을 누리기 위해 한국 클럽에서의 취업을 노려야만 하는 필리핀 여성들, 여성들을 모집하여 트레이닝을 제공하고 비자 발급과 출국까지 도맡는  필리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  그 여성들의 출국을 '돕는' 브로커들, 비자를 발급해줌으로써 이주노동여성들의 한국 입국을 돕는 출입국 관리국와 마닐라 대사관, 한국 클럽에서 여성들을 '관리'하는 여러 관리자들, 클럽에서 여성들을 옆에 앉히고 술을 마시는 미군들. 이렇게 견고한 기지촌 생태계가 이미 만들어진 지금, 이들 중 어느 한 집단을 콕 집어 비난할 수 있을까요?

 

호스트 네이션을 관람하는 사람들 또한 기지촌의 생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영화관에 앉아서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람했던 저는 과연 저 구조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사람일까요? 정말로 저의 삶은 기지촌 생태계, 그 생태계가 영향을 끼치는 이웃 환경들, 혹은 그와 비슷한 형태의 다른 구조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일까요? 또한, 저의 삶이 기지촌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이 정말로 없을까요?


필리핀에서 어묵을 파는 것보다 더 큰 성공을 꿈꾸며 찾아온 한국 기지촌의 클럽에서도, 이주노동여성들은 이 나라의 최약체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여기까지 이 글을 함께 읽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갖가지 힘든 선택을 내린 사람들의 눈앞에 또다른 착취의 현장이 필쳐지는 것은 이미 우리 사회의 흔한 서사이니까요. 


물론 기지촌 이주노동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의 맥락은 조금 특수합니다. 필리핀 출신이고, 한국인들보다 더 어두운 피부색을 갖고 태어났으며, 여성이기까지 한 이들은, 더 많은 차별적 구조가 교차하는 지점을 살아나가야만 합니다. 내가 겪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억압적 생태계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이 글을 쓴 저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13기 인턴 최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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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익법센터 어필 AP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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