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며 짓다, 정의를 | 22년 11월] #34. '한국사회가 지옥이 아닌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당위가 난민변호사에게 주는 무게' - 이일 변호사

2022년 11월 3일

바로 며칠 전입니다. 서울의 도심 이태원 한복판에서 많은 사람이 사망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뉴스를 지켜보고 믿기 어려워했고 반복해서 곱씹으며 함께 슬퍼하고 있는 그날. 결국 시민들은 구조해달라고 정당하게 외쳤고, 막을 수 있었고 막아야 했던 인재였다는 사실들이 점차 공개되어 가자 많은 분들이 황망함과 슬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과 당국자들은 희생자들이 아닌 스스로를 구조하려 하고, 책임을 실무자들에게 떠넘기려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태원이란 공간의 낙인, 여성이라는 낙인, 청년이라는 낙인, 핼러윈이라는 시간에 대한 낙인을 몸에 두껍게 두르고 희생자들을 훈계하며 비난하기도 합니다. 현장에 있던 시민들과 구조대원들은 더 살리지 못했다는 트라우마 속 헤어 나오지 못하고, 유족들과 친구들은 말과 언어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대혼란의 상황 속,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습니다.

다양한 보도 속 알려지는 가슴 아픈 사연들의 이야기 중 한국을 찾은 외국인 희생자들의 소식도 들려옵니다. 지금 편지를 쓰는 이 순간까지 알려진 희생자 중 26명은 외국인입니다. 이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프랑스, 호주,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노르웨이, 카자흐스탄, 스리랑카, 태국, 오스트리아 등 14개국에서 온 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환학생으로 수업을 들으러, 어학연수생으로 한국어를 배우러, 이주노동자로 일하며 미래를 개척하러 온 분들이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자기 자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모님과 유족들이 급히 각국에서 장례를 위해 달려오고 계십니다. 정부는 외교적 문제가 될까 봐 최선의 예우를 다하겠다며 말하고, 외신기자단에 총리가 나서며 기자회견을 자청하였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다릅니다.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설명이 다르고, 유족들의 연락에 책임의 공이 대사관과 정부 당국에게로 서로 떠넘겨진다고 합니다. 정부는 도착 비자를 준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비자를 받기 어려운 국가의 유족들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시신을 운구하여 고국으로 보내려고 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이어서 자녀들의 시신이 영안실을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정부에선 우선 알아서 하고 나중에 청구하라고 한다고 합니다. 외교적 중요성이 보다 떨어지는 약소국의 외국인,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 가족들의 호소는 더욱 들리지도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원으로 이해되고, 능력으로만 평가되며, 더욱이 외국인은 효용으로만 평가되는 한국 사회의 민낯,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지 않는 이 사회는 황망한 죽음을 맞이한 가족들에게 또다시 비수를 던지고 있습니다.

저는 주로 세계 각국 정부의 민낯을 보고 그들로부터 난민들을 한국으로 구조하려고 활동해 나가는 변호사지만, 이러한 황망하고 분노가 처연하게 쌓여가는 이 현실 속, 재난과 그 이후에 일어난 잔인한 차별이 당연한 것처럼 진행되는 한국 사회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숙제를 다시 한번 곱씹게 됩니다.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 말입니다.

왜냐구요? 더 안전한 한국 사회는 난민들에게도 필요합니다. 한국을 찾은 난민들은 전 세계 어디선가 인권침해를 피해 한국에서 안전한 공간을 찾으려는 사람을 뜻합니다. 한국에서 난민들을 변호한다는 것은 그러한 난민들이 ‘빼앗겼던’ 안전을 한국에서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래서 다시 본국에서 당할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난민들을 오랫동안 돕다 보면 죽음 같은 삶을 피해서 찾아온 한국 사회가 안전하지 않은 또 다른 죽음의 공간이라면 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 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니, 자주 경험하고 점점 더 그 빈도가 높아집니다. 수많은 제도적 실패와 혐오, 인종차별과 잔인한 멸시가 공기처럼 떠도는 이곳에서 피난처를 찾게 하는 것을 돕는 일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도, 적어도, 난민들을 구해내면 “최소한 죽음과 잔인한 인권침해로부터 유예는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한국 사회는 조금은 더 떠나온 고국보다 안전하지 않은가?“, “그래도 한국 사회는 미래의 삶을 일굴 계기가 있는 곳이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자위하며 활동의 이유를 찾아갔지만, 이러한 제 답변이 조금씩 깨져가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한국 사회도 ‘내국인, 비장애인, 헤테로 남성‘의 젠더 권력을 가진 경우를 제외한 소수자에게는 안전하지 않고,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은 미래를 일구는 게 아니라 극빈층의 삶을 단지 견디게 하는 것임을 발견해나가면서 말을 잃어갑니다. 그런데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를 보면서, 또 하나 저를 지탱하던 앙상한 답변 하나가 떨어져 나갑니다. 언제든지 아무 이유 없이 누구나 죽을 수 있는 곳 한국 사회라면, 한국이 어떻게 피난처가 될 것인가.

한국 사회를 더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이지만 ‘안전을 찾아온 난민들‘에게는 더 중요한 과제일지 모릅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수많은 난민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 때 구소련으로 끌려가 강제 이주를 당하며 목숨을 부지하려 노력해왔던 고려인 난민들이 또다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경험 속 또다시 연고도 없는 한국으로 피난해 오는 소식에 역사의 잔인함을 다시 느끼기도 합니다. 이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서 한국사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제가 또, 활동가들이 해왔던 너무나 중요하지만, 사실은 협애한 활동 즉 ‘한국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법적 지위를 얻게 하는 것’ 이상의 과제가 사실은 있습니다. 힘에 부쳐서 부러 피해왔지만, 알고 있는 과제들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 구조를 요청하는 난민들을 구조해 뭍까지 오게하는 것 그것만으로 난민들의 평화와 미래를 담보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조된 현장이 또다시 죽음의 공간이라면 그것은 구조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으로서 한국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난민들에게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왜 여기서까지 국민이 아닌 난민을 자꾸 언급하느냐고 말하는 분들에게는 같은 맥락에서 동시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난민들을 제대로 돕지 않는다면, 그 정부는 국민도 제대로 도울 수 없는 정부라고, 한국 사회가 난민들에게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줄 수 없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국민들에게도 어떤 안전한 공간도 마련할 수 없는 사회라고 말입니다.

한국 사회가 낙원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지옥이 되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는 과제. 적어도 한국 사회 속으로 사람들을 구조해가는 활동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한국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아직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무겁게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어필도 함께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이란시위를 지지하는 한국시민모임에서 오늘 이태원 역에 붙인 추모현수막의 문구를 받아 안아 다시 한번 곱씹습니다. “이란인 다섯분을 포함한 모든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모든 희생자에 대한 존엄한 애도와 철저한 진상규명, 평등한 지원과 재발 방지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함께 애쓰겠습니다.”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 이일 작성)

최종수정일: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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